개천교회
- 관리자
- 2024년 10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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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천교회 - 평안남도 개천군 개천읍 군우리
개천교회 역사 (김재신, 북한교회사 92)
개천군은 평안남도의 중부 북단에 위치하며 북으로 청천강을 따라 평안북도 영변군과 경계하고 있다. 행정 구역은 1읍 5면 55리로 가장 작은 군에 속한다. 군청 소재지는 개천읍 군우리였다.
개천에 본 교회 진리가 들어가게 된 것은 김동규 선생의 부친 김렵 씨에 의하여 1934년에 들어갔다. 교회지남 1936년 12월호와 이여식 목사편 선구자와 순교자의 발자취 가운데 고 김석영 목사의 회고란을 참고하여 개천교회 상황을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개천의 한 장로 교인이며 그 지방 면장으로 있던 김렵 씨가 1934 년경에 시조 잡지를 보고 안식일 진리를 깨닫게 되었는데, 김렵 씨가 시조사를 통하여 선교 본부에 현대 진리를 좀더 자세히 연구하기 원하는 뜻을 요청하니 순안에 있는 서선대회에서는 김석영 목사를 개천으로 전근 발령하였다. 참 진리를 알고자 갈망하는 한 영혼을 위하여 목사를 파견해 주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김렵 씨 가정에서 집회를 하였는데 그의 가족들과 소작인들까지 같이 모여 예배를 드렸다. 예배 후에는 김렵 씨 집에서 점심까지 후하게 대접하곤 하였다.
김 목사의 집에서 10리쯤 떨어진 곳에 참외 농사하는 집이 있었는데 그 집 며느리가 정신 이상증이 있었다. 그녀는 전 남편에게서 낳은 아들을 친정에 떼어 놓고 참외밭 집 아들에게 후처로 왔던 것이다. 그녀는 자기 머리를 쥐어뜯는 버릇이 있어서 그의 남편이 머리를 짧게 깎아 주고 발에는 쇠고랑을 채우곤 하였다. 하루는 그녀가 쇠고랑을 찬 채 벼랑 위에 올라가 괴성을 지르는데 아무도 그녀를 내려오게 할 수 없었다. 때마침 이곳을 지나던 김 목사가 그 광경을 보고 조용히 내려오라고 하였다. 그랬더니 그녀는 아무 반항하지 않고 순순히 내려와서 그의 집으로 인도하였다. 그러고 나서 얼마 지난 후에 김 목사는 다시금 그 집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 집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비명소리가 들렸다. 김 목사는 비명소리가 들리는 그 집 방문을 열고 들여다 보니 시어머니와 남편이 그녀의 정신병을 고쳐 준다고 그녀의 척추를 불인두로 지져 주고 있는 것이었다. 김 목사는 이 광경을 보고, 그와같은 미신적인 행위의 무용함과 하나님의 치유하시는 권능을 설교하고 조용히 타이르니 그녀는 김목사의 말을 잘 듣고 얌전해졌다. 그 후 김 목사는 그 집을 자주 방문하여 예배를 드려주었다. 그녀의 정신병도 많이 회복되었다. 이 일이 있은 후 그 녀의 남편과 시어머니까지 교회에 나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김 목사가 개천에서 시무할 때 그 곳에 젊은 우체부가 있었는데 김 목사는 그에게 친절히 대해 주었다. 그 우체부의 아내는 무당이었다. 그녀가 해산 후 어린아이가 일찍 죽고 산모는 젖이 불어 넘쳐서 고생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정을 알게 된 김 목사는 젊은 우체부에게 친절하게 대해 줄 뿐 아니라 진리를 가르쳐 줄 기회로 삼았다. 김 목사는 그에게 그의 부인과 같이 성경을 연구할 것을 제의하였다. 그녀는 처음에는 퍽 두려워하는 눈치였으나 차차 마음의 안정을 되찾고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저들은 드디어 개종 하고 본교에 입교하게 되었다. 이 무렵에 한 여신도가 출산을 하였는데 젖이 부족하여 곤란한 가운데 있는 것을 알게 된 젊은 우체부의 부인은 유모로 봉사하겠다고 자청하여 귀한 어린 생명을 키워 주었다. 그녀는 무당의 일을 여러 해 동안 해서 많은 무명과 광목필이 있었다. 그녀는 개종한 후 그것들을 교회에 헌납하였다. 그때 마침 새로 입교한 이발사 이용진 씨가 있었는데 교회에서는 그 무명과 광목을 이발소에 주어 수건으로 요긴하게 쓰게 하였다. 무당이었던 그녀는 교회에서 봉사하는 일에 힘쓰고 구제하는 일에 같이 협력하였다. 그녀가 기도 드릴 때에는 마치 무당이 굿할 때에 하는 식으로 기도를 하였다고 한다.
1936년 12월호 교회지남을 보면 당시 안식일학교 학생이 49명이고, 교인이 25명이나 되었으며 좋은 예배당도 건축하고 종도 마련되어 신자들은 기쁨으로 출석하는 중에 홍성안식일도 성황리에 지켰다고 하였다.
그후 김렵 씨의 자제 김동규 선생은 서울에 있는 사역자 양성소(신학교)에 입학하여 2년간의 과정을 마치고 1940년 봄에 졸업하고 경성삼육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45년 8•15 해방 후 동년 10월 서울에서 개최된 신도 대회에 개천교회에서 김동규 선생을 비롯하여 현창하, 김동원, 김영규, 그리고 개천군 북면 람전리 가정 안식일학교에서 정용운이 참석하였다. 그리고 1950년 6•25 당시 안식일학교 보고에 의하면 안식일학교 교장 김동익, 학생수 39명, 교인수 28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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